요즘 고려의 고승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태고보우라는 분인데 조선 시대의 승려 보우와 구별하기 위해 태고를 붙입니다. 이분이 우리나라 선승의 중시조로 불리는 분인데 일찍이 깨우침을 얻어 나중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임제종의 대를 잇는 후계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왜 선불교 얘기를 하냐고 물으신다면, 먹고 살기 위해 이 보우 스님의 일생에 대한 동화를 맡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도 선승의 이야기를 동화로 풀어줄 저자를 찾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 점에서 제가 좀 이점이 있습니다. 조계종 종립인 동국대를 나오고 역사를 전공한 글쟁이니까요.
만법귀일(萬法歸一)은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가듯 모든 생각은 결국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승려가 된 보우가 선방으로 들어가 몰두한 첫 번째 화두입니다. 선승들은 경전을 읽는 것보다 명상으로 한 번에 깨우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는 석가가 보리수나무에서 깨우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